제7장 서방의 복속

 

[서방의 로마화]

역사적 경로가 정치적 이기심의 시시한 단조—이는 원로원의사당에서 수도거리에서 있던 전투들이다—에서 로마의 첫 군주가 그나이우스냐 가이우스냐 마르쿠스냐로 불릴지에 관한 문제 보다 더 중대한 문제로 전환하려 할 찰나—그 영향이 세계의 운명에 오늘날까지 영향을 주는 사건의 문턱—에, 우리는 이제 잠시 우리 주변을 돌아보고 로마인이 지금의 프랑스에 대한 정복한 것과 독일과 영국의 거주민과 접촉한 것을 관점이 세계사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도록 하는 것을 역시 허용할 수 있다. 한 국가로 성장해 온 민족이 정치적 미성년자로 있던 이웃을 흡수한다는 것과 문명화된 민족이 지적미성숙에 있던 이웃을 흡수한다는 법에 따라 보편적으로 유효하고 중력법칙만큼이나 자연법칙인 이 법 덕에,이탈리아 국민(문명화가 외적이고 불완전한 방식이긴 하나 우월한 정치발전과 우월한 문명화를 동시에 결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국민)은 멸망을 눈앞에 둔 운명의 동방의 그리스인들을 복속시키고 그보다 낮은 등급의 서방의 민족들—리비아인들(Libyans), 이베리아인들(Iberians), 켈트족(Celts), 게르만족(Germans)—이 이주민들을 통해 밀려나게 했다. 잉글랜드가 같은 권리로 아시아에서 뛰어나나 정치적으로 무능한 경쟁문명을 복속하고 아메리카와 호주에서 광범위한 야만국들을 상대로 그 국민성에서 고귀한 인상을 남겼고 그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로마귀족정은 이 업무수행할 예비조건인 이탈리아 통일을 성취하였다. 그 과제를 자체로 해결하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 외의 정복은 언제나 단순 필요악이나 국가의 범위외의 재정적 소유라고 생각하였다. 이를 최고의 목적으로 정확히 이해하고 정력적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로마의 민주정 혹은 군주정—왜냐면 둘은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의 불멸의 영예인 것이다. 환경이란 불가항력이 그 길을 놓은 것으로 원로원이 그 의지에 반해 동방은 물론 서방에서의 로마 미래 지배역의 기초를 확립한 것, 속주들로의 로마인의 이민—공적인 근심거리로 온 것을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방 지역에서는 어쨌든 상위문화의 개척자로서 온 것—이 본능의 문제로서 추구한 것, 이것들은 로마 민주정의 주조자인 가이우스 그라쿠스(Gaius Gracchus)가 정치인다운 명확함과 확신으로 이해하여 실행하기 시작했던 것들이었다. 새로운 정책의 두가지 기본적 관념—희랍적일 때 로마권력 아래 그 영토를 통합하고 희랍적이지 않을 때는 식민화한다—은 이미 그라쿠스 시대에 실제적으로 아탈루스(Attalus)의 왕국을 몰수할 때와 플라쿠스(Flaccus)가 알프스이북을 정복할 때 인식되었던 바다. 하지만 유력한 반작용이 다시 한번 방해했다. 로마국가는 철저한 점령이나 적당한 경계없이 나라들의 황폐한 집합체로 남았다. 스페인과 그리스화된 아시아 지역의 소유는 해안을 따라 로마에 속하지 않은 경계지대를 겨우 가진 넓은 영토로 모국에서 분리되었다. 아프리카 북해안에 카르타고(Carthag)와 키레네(Cyrene)의 영지만 당랑 오아시스 같이 점령되었다. 종속된 영토조차도 많은 부분 특히 스페인에서 이름만 로마에 종속된 상태였다. 그들 영역에 집중하고 주변영지 정리하는 것에서 정부측에서 한 일은 절대적으로 없었고, 함대의 쇠퇴가 드디어 먼 소유지들 간의 마지막 묶음을 끊었다. 민주주의파는 분명히 그 고개를 들자마자 그라쿠스적 정신—특히 마리우스가 이 생각을 아꼈다—으로 대외정책을 주조하기 시작했다만 키를 제대로 쥘 수 없는 상태라 계획은 충족되지 못하다가, 민주주의파가 684년[BC70] 술라체제의 전복 후 복귀해서야 이 관점에서의 혁명이 일어났다. 지중해에 대한 그들의 주권이 우선 회복되었는데 이런 것은 로마처럼 한 국가에는 생존의 중대문제였다. 동쪽으로는 더우기 유프라테스(Euphrates)의 경계가 폰투스(Pontus)와 시리아(Syria) 속주들의 병합으로 보호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알프스 건너로는 북쪽으로나 서쪽로 로마 영토의 주변정리를 하고 동시에 그곳에 희랍문명을 위한 그리고 이탈리아 종족의 혈기와 열정을 위한 처녀지를 얻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카이사르 정복의 역사적 중요성]

이 과업을 수행한 것이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였다. 갈리아를 단순히 카이사르가 임박한 내전을 위해 자신과 자기 군단이 훈련하는 연병장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한 개 실수 이상이며 역사를 지배하는 성령(신성한 정신)에 대한 테러다. 서방의 복속은 카이사르에게 알프스너머의 전쟁에서 후대 그가 세운 세력의 기초를 놓는다는 목적에 한 수단이었을지라도, 그것은 수단이 그 자체로 목적도 되는 천재적 정치인의 특권이다. 카아사르는 물론 그의 당파를 위해 군사적 힘을 목적으로 두었지만 그 당원으로서 갈리아를 정복한 것은 아니었다. 로마는 계속되는 게르만족의 침입의 위협에 맞서 로마 세계의 평화를 수호할 댐을 쌓아야 하는 직접적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이 중한 목표도 카이사르에게 갈리아가 정복된 최고의 궁극적 이유는 아니다. 로마시민들에게 옛 고향은 너무나 좁아 쇠퇴의 위기 중에서, 원로원의 이탈리아 정복 계획은 이들을 파멸에서 구한 것이다. 이제 이탈리아란는 집이 너무 협소하여졌다. 다시 한번 국가가 방식은 비슷하나 더 대규모로 반복되는 동일한 사회악들 아래 신음하였다. 카아사르를 알프스 너머로 이끈 것은 천재적 발상이자 거대한 희망으로, 곧 그의 동료시민들에게 새로운 무한경계의 집을 마련하여 국가를 두번째로 더 넓은 기초 위에서 재생시키려는 이상과 확신적 기대였던 것이다.

 

[스페인의 카이사르]

어떤 의미에서 카이사르가 693년[BC61] 먼스페인에서 수행한 전쟁은 어떤 의미에서 서방정복의 목적을 예견할 수 있기도 하다. 스페인이 로마인을 따라온 이래 그 서해안은 칼라이키족(Callaec)에 대한 데키무스 브루투스(Decimus Brutus)의 원정 이후까지 실질적으로 독립상태였고[각주:1], 북해안은 숫제 발를 딛이지도 못했다. 복속된 속주들이 그런 곳으로 부터 노출되어 일어난 노략질은 스페인의 문명화와 로마화에 적지 않은 장애였던 것이다. 이에 맞서 서해안을 따라 카이사르는 원정의 방향을 잡았다. 북으로 타구스(Tagus) 강과 경계한 헤르미니우스 산맥(Herminian mountains: 세라 다 에스트렐라Sierra de Estrella)을 가로질렀다. 주민들을 정복해 부분적으로 평지로 옮긴 후 그 나라를 도루(Douro) 강 양안으로 축소시키고 반도의 북동지점에 도달했다. 거기서 가데스(Gades)에서 온 소함대의 지원으로  브리간티움(Brigantium: 코로나Corunna)을 점령했다. 이에 의해 대서양 인접 종족들, 루시타니아인(Lusitanian)과 칼라이키인(Callaecian)들이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였으며, 정복자측에선 즉시 로마에 지불할 세공을 줄이고 공동체의 재정문제를 맡음으로써 더 관용적으로 속민들의 위치를 정하는데 주의하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장군이자 정치인의 군사적이고 행정적인 데뷔에서 후에 더 큰 무대에서 입증한 같은 재능과 지도자적 이상을 분별해 낼 수 있긴 하지만, 이베리아(Iberia) 반도 내의 그의 대리는 깊은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나 잠정적이 것이었다.  특히 강한 신체적 민족적 특성 때문에 상당기간 꾸준하게 계속 유지된 행동 외에는 거기에다 지속적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Tätigkeit hier eine dauernde Wirkung äußern konnte.]

[갈리아]

서방에서의 로마의 발전상에 더 중요한 부분은 피레네(Pyrenee) 산맥과 라인(Rhine) 강, 지중해와 대서양 사이로 펼쳐진 나라 아우구스투스 시대이래로 켈트인의 땅—갈리아(Gallia)—으로 특히 호칭된 나라에 그 운명이 유보되어 있었다. 켈트인의 땅이란 엄밀히 어떤 때는 더 좁고 다른 때는 좀 더 넓게 볼 수 있는 말로, 그 나라는 아우구스투스 이전에는 민족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 이유로 카이사르가 696년[BC58] 그의 도착시에 만났던 아주 이질적인 이 국가의 분명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로마속주 갈리아]
지중해 위에 있는 이 지역은 론강 서편에 랑그독(Languedoc)을 그 동편에 도피네( Dauphine )와 프로방스(Provence)를 아우르면서 60년간 로마의 한 속주였는데, 로마의 칼은 이 곳을 휩쓴 킴브리아족의 침공 이래 거의 쉴 날이 없었다. [전쟁과 반란] 664년[BC90], 가이우스 카일리우사(Gaius Caelius)가 살리에스(Salyes)족과 아쿠아이 섹스티아이(Aquae Sextiae) 쯤에서 싸우고, 674년[BC80] 가이우스 플라쿠스(Gaius Flaccus)[각주:2]가 스페인으로 진군할 때 다른 켈트 주의 민족들과 싸웠다. 세르토리우스 전쟁에서 총독 루키우스 만리우스(Lucius Manlius)가 피레네산맥 너머 그의 동료들을 원조하려고 서두를 때 일레르다(Ilerda: 지금 레리다Lérida)에서 패해하여 돌아오는 귀국 도중에 로마속주의 서방 이웃들이라 할 아퀴나티아(Aquitani)족에게 두번째로 패배당하였을 때(676년 쯤[각주:3]), 이는 피레네산맥과 론강 사이의 속주민들의 일반적 봉기에 불을 집힐 것처럼 보였다. 폼페이우스는 칼로 반란의 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칼로 길을 뚫고[각주:4], 반란의 벌로 볼카아 아레코미키(Volcae-Arecomici)족과 헬베족(Helvii)의 영토(가르와 아르데슈주 주: Dep. Gard und Ardêche)를 마실리족(Massiliot)에게 넘겨주었다. 총독 마니우스 폰테이우스(Manius Fonteius:678-680[BC76-74])는 이런 계획을 실행하였고 보콘티족(Vocontii: 프랑스 드롬주)을 정복하여 반도들에게 마실리아(Massilia)를 보호하고 그들이 공성중던 그곳의 로마수도 나르본(Narbo)을 해방함으로써 속주의 평화를 회복하였다. 스페인전쟁의 고통의 분담[각주:5]과 로마인의 공식 비공식 수탈이 갈리아 속주들에게 가져다 준 재정난은 절망과 함께 평온하게 놔두지를 않는 것이었다. 특히 나르보에서 가장 먼 알로브로게스족의 마을은 항구적 소요에 있어던 점은 가이우스 피소(Gaius Piso)가 688년[BC66]에 이룬 "평화구축"은 물론 로마에서 알로브게스의 사절단이 691년[BC63] 무정부주의자음모에서 한 행동으로[각주:6] 뒷받침되거니와 또 후에는 (694년[BC61]) 이 절망적 전쟁 속에서 알로브로게스의 지도자 카투그나투스(Catugnatus)의 공개적 반란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처음 선전하였으나 솔로니움(Solonium)에서 영광스러운 저항 후에 총독 가이우스 폼프티누스(Gaius Pomptinus)에게 정복되었던 것이다.   

[경계]

이 모든 충돌들에도 불구, 로마 영토의 경계는 실질적으로 별 진전이 없었다. 폼페이우스(Pompeius)가 세르토리우스군의 잔당을 정착시킨 루그두눔 코페나룸(Lugudunum Convenarum)[각주:7], 그리고 톨로사(Tolosa)와 비엔나(Vienna)와 제네바(Genava) 들이 여전히 서쪽과 북쪽을 향하는 가장 먼 거리의 로마 마을이었다. [로마와의 관계] 그러나 동시에 모국을 위한 이와 같은 갈리아 소유의 중요성이 끊임없는 증대되는 중이었다. 이탈리아에 친숙한 빛나는 기후, 비옥한 토양, 브리타니아까지 상업항로가 열린 유리한 위치의 크고 부유한 지역, 모국과의 수륙으로 쉬운 교통이 남부 갈리아에게 이탈리아를 향해 그 중요성을 급속히 더해갔는데, 이는 다른 소유지들 예컨대 스페인에서 얻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 시기 정치적 난파를 당한 로마인들이 도피처를 특히 마실리아(Massilia)에 차리면서 한번 더 이탈리아의 문화와 사치를 거기에 세우자, 이탈리아로 부터 자발적인 이민이 점차로 더 론강과 가론강에 매혹되었다. "갈리아 속주"란 카이사르 도착 10년 전에 그려진 풍경으로도 "상인들로 가득찼고 로마시민들로 북적댁 있으며 갈리아의 토민은 로마인의 간섭없이 어떤 사업도 하지 못하고 갈리아에서 도는 모든 동전들도 로마시민의 회계장부를 거친다"는 것이다. 같은 묘사에 나르보(Narbo)의 식민가들 외에도 경작을 하고 가축을 기르는 로마인들이 다수 갈리아에 거주하였다 하며, 하지만 그에 관해서는 로마인에 의해 소유된 속주 토지 대부분이 마치 아메리카의 초기 시대 영국 소유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 처럼 이탈리아에 사는 고위 귀족의 손에 있어 농민과 목축업자들은 대부분 그들의 사환—노예나 해방노예—으로나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로마화 발단]

이런 환경에서 문명화와 로마화가 얼마나 급속히 토민들 중에 퍼졌는지 이해하는 것은 쉽다. 켈트족들은 농경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주인들은 검과 쟁기를 바꾸도록 강제하였으며 알로브로게스족 주민들이 부분적으로 이에 거세게 저항한 것은 아주 신뢰할 만하다. 이전 시기 희랍주의 문화도 일정 정도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 고급문화 요소, 포도와 올리브 경작[각주:8]에 대한 그리고 문자사용에 대한[각주:9] 돈의 주조에 대한 자극이 마실리아에서 들어왔던 것이다. 희랍문화는 이 경우 로마인들이 보류했다고 볼 수 없다. 마실리아는 그들에게 통해 잃은 것보다 영향 받은 바가 많았으며 심지어 로마시기에 조차 그리스 의사와 수사학자들이 공공연히 갈리아 주들에 고용되었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바로 남부 갈리아의 희랍주의는 로마인에 의해 이탈리아에서와 같은 것을 획득했다. 뚜렷하게 희랍문명은 라틴-그리스 혼성문화를 주었고, 이는 거기서 곧 대거 개종자들을 만들어 냈다. 남부 갈리아의 거주민으로서의 "토가걸친 갈리아인"은 이미 로마화가 종료된 후자와 같지 않았지만, 북부 지구에 아직 복속되지 않은 "장발의 갈리아인"과는 뚜렷이 구분되었다. 그들 중에 자연스럽게 된  세미컬춰(semiculture)가 야만스러운 라틴어에 대한 조롱 소재를 충분히 주었으며, 민중들은 틀림없이 "토가와의 관계"로 켈트 후손이라 의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형편없는 라틴어는 먼 알로브로게스인들 조차도 로마당국과 거래하고 통역없이 로마법정에서 할 수 있게 했다. 

이들 지역의 켈트계 그리고 리구리아계 인구가 그 민족성을 잃어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희망없는 반란으로 충분히 증명되는 불관용성으로 대표되는 정치경제적 억압 속에 고통받으면서, 토착인구는 우리가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 발견하는 똑같은 고급문화의 자연수용과 나란히 나아갔다. 아쿠아이 섹스티아이(Aquae Sextiae) 나아가 나르본은 상당한 도회였는데 아마도 베네벤툼(Beneventum)과 카푸아(Capua)와 나란히 거명되었으며, 최고로 조직되고 더 자유스럽고 자위능력이 최고였으며 로마의 종속된 그리스 도시 중 가장 강력한 마실리아는 로마보수파가 아마 좋은 도시 체제의 모범으로 지목하였던 철저한 귀족정 아래서 로마인에 의해 상당히 넓혀진 중요 영토와 무역권을 소유하면서 레기움(Rhegium)과 네아폴리스(Neapolis)가  베네벤툼과 카푸아에 그러한 것과 같이 라틴계 소도시들과 병립했다.

 

 

 

 

 

 

 

  1. V. IV. Aggregate Results [본문으로]
  2. IV. IX. Spain [본문으로]
  3. V. I. Renewed Outbreak of the Spanish Insurrection [본문으로]
  4. V. I. Pompeius in Gaul [본문으로]
  5. V. I. Indefinite and Perilous Character of the Sertorian War [본문으로]
  6. V. I. Indefinite and Perilous Character of the Sertorian War [본문으로]
  7. V. I. Pompeius Puts and End to the Insurrection [본문으로]
  8. IV. II. Scipio Aemilianus [본문으로]
  9. 예를 들어, 보콘티족 주(Vocontian canton)인 베종(Vaison)에서 발견된 그리스 알파벳으로 기록된 켈트어 비문이 발견된 것을 들수 있다. —σεγομαρος ουιλλονεος τοουτιους ναμαυσατις ειωρου βηλησαμισοσιν νεμητον—. 마지막 단어는 "신성(神性)함"을 말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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