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체제복귀

<공석이 된 정부> 가이우스 크라쿠스(Gaius Gracchus)가 보여준 새로운 구조는 그의 사망에 임해 폐허가 되었다. 그의 죽음은 실제 그의 형의 죽음처럼 기본적으로 단순 복수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달리는 겨우 동시에 구정체(舊政體)로의 복귀를 향한 실질적으로 한 걸음이었는데 군주적 인물이 막 확립되려는 군주제를 빼앗겼을 때의 일이다. 가이우스(Gaius)의 몰락과 오피미우스(Opimius)의 전면적이고 유혈적인 재판 이후, 그 공석을 감히 차지하려는 시도에서 쓰러진 국가의 수장과 혈연관계로나 개인적 탁월성에 의해 합법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이는 절대적으로 없었다. 가이우스는 자식없이 이 세상을 떠났고 티베리우스가 남긴 아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죽었다. 소위 전 민중적 당파에서 문자그대로라도 지도자란 칭호를 받을 자는 없었다. 그라쿠스식 정체는 사령관 없는 요새를 닮았다. 성벽과 수비대는 다치지 않아도 장군은 부족하며 타도된 정부의 빈 자리를 취할 무언가는 전혀 없었다.

<복귀된 귀족정> 그래서 일은 그렇게 된 것이다. 상속자 없는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사후 원로원정부가 자동적으로 그에 자리잡았는데, 이는 호민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제거되지 않고 그에 의해 단순히 예외적 절차로 실질적 무화 상태로 되어있어 있었다는 면에서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복귀과정에서 국가란 장치가 수세기를 굴러온 옛 궤적으로 들어가는 것 이상을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단한 잘못이다. 복귀란 언제나 혁명인 법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그것이 옛 통치라기 보다는 복귀된 옛 섭정(군주)이다. 과두제는 이미 타도된 참주정이란 갑옷을 새로 입은 채 나타났다. 원로원이 자신들의 무기로 그라쿠스를 두드려 팬 만큼이나 그들은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그라쿠스식 정체의 지배방식을 이어갔다. 물론 숨은 동기상으로 완전히 일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배귀족에 실질적으로 적대적인 요소들을 철저히 씻어내는 것이 함께였다.

<민주당파의 고발들>우선 반동은 주로 인물을 향했다. 푸블리우스 포필리우스(Publius Popillius)가 그에 관한 조치가 취소된(633년[BC121]) 이후 유배지에서 돌아왔고 고발전쟁이 그라쿠스 지지자들에 대해 수행되었다. 반면 루키우스 오피미우스를 사임 후 반역죄로 단죄하려는 민중당파의 시도는 여당에 의해 좌절된다(634년[BC120]). 이 복귀정부는 귀족정치에 대한 지조에서 특징이 발견된다. 한 때 그라쿠스 형제의 동맹이던 가이우스 카르보(Gaius Carbo)는 오랫동안 개종자로 있었으나[각주:1], 이젠 오피미우스의 수호자로서 그의 열정과 쓸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변절자로 남게 되었다. 오피미우스를 향한 것과 같은 고발이 민주당파에 의해 그에게 제기되었을 때 그의 몰락을 기꺼이 막지 않으려 하는 정부에 대해 카르보는 자신이 양파에서 버려진 것을 알고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렇게 해서 반동적 인물들은 개인신상에서 순수 귀족당임을 증명한다. 그러나 반동은 즉시 식량배분, 아시아 속주의 과세, 배심원과 법정에 대한 그라쿠스안을 즉각 공격치 않았다. 오히려 상인계급과 도시무산자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이들 세력들 특히 무산자들에게 그라쿠스 형제가 한 이상 단호하게 리비우스 법들의 소개에서 했었던 것처럼의 존경을 계속 보였다. 이 과정은 단순히 그라쿠스 혁명이 동시대인을 여전히 떨게 하고 그 창출물을 보호하였기 때문에 채택된 것은 아니다. 적어도 민중의 이익을 양성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귀족층의 개인적 이익과도 부합하여서 공공복리 외엔 희생될 것은 없었다.

<복귀기의 영지문제>가이우스 그라쿠스에게서 공공복리증진을 위해 고안된 이 모든 조치들—최상이나 명백히 그의 입법상 가장 인기없는 부분들—이 귀족파에 의해 버려졌다. 그의 계획의 가장 고귀한 것인 로마시민들 간을 우선으로 하고 다시 이탈리아와 속주간에 평등성을 도입하려는 그리고 국가의 지배장악하는 자들과 단순 봉사근로하는 자들의 구분을 없앤 만큼 동시에 역사상 알려진 가장 체계적 이주를 통해 그런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만큼이나 빠르고 성공적으로 공격받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런 황소고집과 망령으로 회복된 과주정은 죽은 세대의 원칙—이탈리아가 지배자로 남아야 하고 로마가 이탈리아의 지배도시여야 한다는 것—을 현재 새롭게 강요했다. 그라쿠스 생시조차 이탈리아 동맹들의 주장은 결정적으로 거부되었으며 해외식민의 위대한 이상은 아주 심각한 공격에 노출되어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사후, 카르타고 재건계획은 비록 개별할당분은 그 수혜자에게 남겨졌지만 간단히 여당에 의해 유보되었다. 민주당파에 의한 비슷한 사업을 다른 지점에서 추진할 때엔 그들은 싸울 수 없었다. 마르쿠스 플라쿠스(Marcus Flaccus)가 시작한 알프스 이북의 정복과정에서, 나르보(Narbo)의 식민지가 636년[BC118]에 로마제국 사상 가장 오랜 해외의 시민도시로 설립되었다. 여당에 의한 여러방면의 공격과 원로원의 제거를 위한 직접적 결의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가 가진 상업적 수익성으로 인해 영구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이 예외—고립에 있어 그리 중하지 않다—를 제하면 이 정부는 이탈리아 밖 영토 할당을 꾸준히 금지해 낼 수 있었다. 

이탈리아 영지문제는 비슷한 관점에서 토대지어 졌다. 가이우스의 이탈리아 식민지들 특히 카푸아(Capua)는 취소되었고 이미 이주된 곳도 해산되었다. 타렌툼(Tarentum)의 중요치 않은 곳 하나만 넵투니아(Neptunia)라는 신도시 형태로 이전 그리스 공동체와 나란히 위치되었다. 이미 비식민적 할당으로 배분된 영지는 수익자 손에 많이 남은 만큼이나 국익을 위해 그라쿠스에 의해 그들에게 부과된 제한—토지임차와 양도금지—은 마르쿠스 드루수스(Marcus Drusus)에 의해 제거되었다. 점유권에 의해 여전히 소유된 영지—라틴인들에 향유되는 영지를 넘어 서서 그라쿠스 최고치기준[각주:2]에 따라 그 보유자에게 남겨진 부동산들로 대부분 구성되었다—에 관해서는 반대로, 이제껏 점유자였던 자들에 대해 그것들을 보존해 주고 미래분배의 가능성을 차단하도록 단호히 결의되었다. 드루수스가 약속한 36,000의 새로운 농장할당의 대상은 의심할 바 없이 이런 땅들이 주된 것이었다. 하지만, 수십만 에이커의 이런 이탈리아 영지를 어디서 찾을 지에 관해 조사하는 수고를 그들은 스스로 면하면서 그 목적에 봉사하는 리비우스 식민법을 암묵적으로 보류했다—아마도 오직 스코라키움(Scolacium: Squillace)의 작은 식민지만 드루수스의 식민법에 언급된다. 민중호민관 스푸리우스 토리우스(Spurius Thorius)가 원로원의 지시로 통과시킨 법은 반면, 배분위원회가 635년[BC119] 없어지도록 했고 공유지 점유자에게 고정임차료를 부과했다. 이 절차는 수도의 민중에게는 이익이 되었는데 곡물배분 자금일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계속되는 곡물기금의 증가를 포함한 제안들은 가이우스 마리우스(Gaius Marius) 같은 현명한 호민관에 의해 회피되었다. 마지막 단계는 8년 후(643년[BC111])에 있었는데, 이 때 민중의 새로운 결의로[각주:3] 점유된 공유지가 직접 전점유자의 사유재산으로 전환되었다. 거기서 미래에는 공유지가 점유되지 않고 임대되거나 공공방목지로 개방되도록 한다는 것도 추가했다. 후자의 경우 큰 가축 10두와 작은 가축 50두의 아주 낮은 상한을 고정하여서 큰 가축소유자는 실질적으로 작은 가축을 포기해야 했다. 이런 현명한 규제로 오랫동안 방치된 점유방식의 유해성[각주:4]은 드디어 인정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언제나 국가에서 그 소유를 빼앗을 때만 적용되었다. 로마귀족파들은 이렇게 스스로를 지켰고 어떤 공유지든 그들 손에 있는 것은 자기 재산으로 전환시켰다. 이탈리아 동맹들을 다룰 때는 특히 자치를 담당한 그들의 귀족층이 누리던  라틴의 영지의 소유권을 주지 않고 그들의 규약에 의해 그들에게 보증된 권리들을 손상없이 보존하는 것으로 달랬다. 반대당은 불리한 위치에서 있기에, 가장 중한 실질문제에서 이탈리아인들의 이익은 도시의 반대파들과 정면 충돌했다. 실상 이탈리아인들은 로마정부와 동맹을 이루어 로마의 다양한 선동가들의 이상한 계획에 맞서 원로원의 보호를 찾았다.

<복귀기의 무산층과 기사계급> 복귀정부가 이렇게 그라쿠스식 정체에 존재했던 개선의 씨앗을 박멸하는데 철저히 주의한 반면, 그라쿠스가 보편행복을 위한 것이 아닌 일로 일깨운 적대세력들의 존재 앞에서는 완전히 무능한 채로 남았다. 수도의 무산자들은 공인된 칭호로 남았다. 원로원은 마찬가지로 상업계급에서 배심원을 뽑는 것에 침묵했는데 이 멍예는 귀족층의 우수하고 자랑스런 부분에 대해 더 불쾌한 멍에였다. 귀족층이 쓴 족쇄는 그 위엄에 맞지 않았으나 이를 그들이 심각히 제거한 것을 발견치 못한다. 632년[BC122]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법은 해방노예의 투표권에 대한 적어도 헌정적 제한을 강제하였는데 오랫동안 원로원측이 그들의 하층폭군들을 억제하는 유일한 시도이자 아주 약한 시도로 남았다. 집정관 퀸투스 카이피오(Quintus Caepio)가 기사관직의 도입(684년[BC106]) 후 다시 재판을 원로원계급의 배심원에게 위임하도록 한 제안은 이 정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지만 문제를 영향력 있는 수준으로 밀고 가는 것 까지일 때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보여주었다.  그것은 멈춰섰다.[각주:5] 이 정부는 그 권력을 공유한 불편한 협력자들에게서 해방되지 못했지만, 이런 조치들은 상인계급과 무산계급과의 지배귀족과의 그리 신중치 못한 협정을 계속 교란은 했을 것이다. 양자 모두 원로원이 꺼리지만 두려움에서만 양보를 한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은혜로나 이익으로나 원로원의 지배에 항구적으로 밀착한 것이 아닌 양자는 그들에게 더 많이 주는 다른 주인에게는 언제든지 비슷한 봉사를 하려했고 기회가 있으면 원로원을 속이고 방해하는 것을 서슴없이 했다. 이처럼 복귀체제는 합법적 귀족층의 욕망과 감정은 물론 참주정부의 국제와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그 지배는 그라쿠스의 것돠 같은 기초에 근거할 뿐 아니라 못지않게 병들었고 실상은 더 나쁘게 쌓아졌다. 대중과 합심되어 그 힘을 받으면 강하였으나, 거리의 패거리와 상인의 이익과 상충되면 철저히 무력해졌다. 이는 공석의 왕좌 위에 비양심과 사분된 희망과 함께 앉은 셈이다. 지배하는 국가조직에 화가 나 있지만 체계적으로 공격하지는 못하며 자기의 실제 이익이 결정을 재촉하지 않으면 우유부단했다. 자당과 반대당에 한결같이 불성실, 내적 불일치, 최고의 무능, 비천한 이기심의 잘못된 지배의 비길 데 없는 관념들의 초상이었다.

<복귀기의 인물들>달리 될 수는 없었다. 전국이 지적 도덕적 쇠퇴기에 있었고 특히 상류계급에서 심했다. 그라쿠스기 이전 귀족층은 사실 재능면에서 과할 정도로 충만하지는 않았으며 원로원좌석은 겁약한 귀족들로 붐볐다. 그럼에도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 가이우스 라일리우스(Gaius Laelius), 퀸투스 메텔루스(Quintus Metellus), 푸블리우스 스카이볼라(Publius Crassus)와 많은 다른 존경받는 능력자들이 있었고, 호의적인 관찰자들은 불의 중에도 절제와 잘못된 정치의 속에서도 일정한 예의를 원로원이 가졌다는 의견을 가졌을 것이다. 이 귀족층이 타도된 후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귀족층은 복귀의 저주에 의존했다. 귀족층이 전에 잘했든 잘못했든 한세기간을 별 현저한 반대없이 다스리는 동안 이제 헤쳐온 위기는 어둔 밤의 불빛 처럼 그 앞에 아가리를 벌린 깊은 수렁을 보이고 있었다. 원한과 공포가 구귀족 대가들의 정부를 특징짓는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자가 단일정예로 뭉친 당으로 지금까지 지배에 참여못하는 대중보다 더 단호한 폭력으로 맞서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가족정부가 파트리키우스정체(patriciate)의 최악의 시기에 그런 것이 다시 한번 이제 성행하여 퀸투스 메텔루스의 네 아들과 아마 두 조카되는 이들—예외는 있지만 철저히 범용한 자들로 그 단순성 때문에 공직에 나간 이들이다—이 그 사위야 말할 것 없이 15년 내(631-645년간[BC123-109]) 집정관직에 모두 도달했고 한 명 빼고 개선식을 올렸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반대당을 향한 마음에 폭력과 잔인성을 가질 수록 영예를 받고 격정과 치욕이 진짜 귀족이라며 용서받는다는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지배자나 피치자 모두 전쟁하는 두 당파를 모든 면에서 닮고 그 전쟁에선 어떤 국제법도 소용없다는 것만 다른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구귀족이 민중을 방망이로 두들겼다면 이 복귀귀족은 타이른 셈이다. 권력으로 돌아갔으나 현명함과 개선과는 거리가 있다. 그라쿠스 혁명에서 킨나 혁명 까지인 이 복귀기 만큼이나 로마 귀족이 정치군사적 능력에서 이렇게도 결핍한 것은 이제껏 없었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Marcus Aemilius Scaurus)> 이런 것의 중한 예시가 이 당시 원로원파의 수장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에게서 주어진다. 고위귀족이나 부하지 않은 부모를 두어 그의 비범한 재능을 사용해야 했던 그는 집정관(639년[115])과 감찰관(645년[BC109])에 까지 뛰어올랐고 오랫동안 원로원의 수장이자 정치적 신탁을 가졌고 연설가나 작가로 뿐 아니라 이 세기 지어진 주요 공공 건물의 창조자로 그 이름이 불멸화되었다. 그러나, 그를 더 가까이보면 그의 크게 칭송되는 업적은 단순히 장군으로서는 알프스의 싸구려 마을을 얻은 것이요 정치가로는 투표나 사치에 대한 자신의 법으로 이 시기의 혁명적 정신에 대해 승리를 얻은 것 뿐이다. 그의 진짜 재능은 이에 있었다. 다른 올곧은 원로원의원 처럼 매수가능한 자이면서 교활하게도 위험해지려할 때를 분간하였으며, 무엇보다도 괜찮은 정직한 외모로 파브리키우스(Fabricius)의 역을 공중의 앞에서 해냈다. 군사적 면에서 볼 때, 의심할 바 없이 최고귀족 동아리내에 속하는 유능한 관리의 존경할 만한 예외를 찾아 볼 수 있지만, 그 규칙이란 군대지휘를 하게 될 때 급히 그리스 군사교본과 로마연대기를 군사적 의사소통을 위해 필요한 만큼 뒤척이다가 전장에 나가 실제 지히권을 천한 출생이나 능력과 절제 있는 관리에게 양도하는 현명함을 보이는 것이 다였다. 사실 두세기 이전에 원로원이 왕의 의회를 닮았어도 그 후계들은 군주 역을 잘못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복귀 귀족들의 무능은 그들의 정치도덕적 무용성과 완전히 등치되었다. 그가 돌아간 국교가 이 시기 야수적 방탕의 진실된 반영은 아니라해도 또 이 시기 외부의 역사가 그 가장 본질적 요소의 하나로 로마 귀족의 철저한 타락을 보여주진 않는다해도 로마 최고동아리 중의 급격한 계승 속에 밝혀진 이 끔찍한 범죄들 하나만도 그 성격을 보이기 충분하다.

 

 

 

  1. IV. III. Democratic Agitation under Carbo and Flaccus [본문으로]
  2. IV. II. Tribunate of Gracchus [본문으로]
  3. 많은 부분이 현전하며 잘못된 이름으로 알려진다. 그 이름은 300년간을 토리우스 법에서 내려왔다. [본문으로]
  4. II. VII. Attempts at Peace [본문으로]
  5. II. VII. Attempts at Peac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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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마르쿠스 레비두스와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반대파 술라(Sulla)가 이듬해 676[BC78]년 죽었을 때 그가 회생시킨 과두제(寡頭制)는 로마국가 상에 무제한 군림하였으나, 이는 강제로 확립된 만큼 그에 맞선 수많은 공개 비공개 적들에 맞서 유지되기 위해 또 다른 강제를 요하였다. 이는 인정된 지도자 아래 움직이는 분명한 목표를 가진 단일 당파의 반대이 아니라, 통상 민중파란 이름 아래 뭉쳐 실상 술라가 조직한 공화국조직 여러 이유와 계획으로 반대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단체들의 반대를 부른 것이었다. 법학자들 시민의 삶과 재산을 다루는 임의적인 술라식 정치에 가담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실정법주의 인물들이 있었다. 심지어 모든 반대자들이 침묵한 술라 생시에도 엄격한 법률가들이 이 섭정에 저항했다. 코르넬리우스 법(Cornelian laws)을 예로 들자면 이는 이탈리아 공동체들에게서 로마 시민권을 박탈해 가는 것이나 사법결정으로 무효화되었으며, 이제는 같은 방식으로 법정에서는 시민이 혁명기에 전쟁포로로 노예로 팔릴 때 그의 시민권이 무효화되지 않는다고 평결했다. 개혁지향귀족파 더우기, 원로원 내에는 전시기 개혁당과 이탈리아인의 협력을 위해 노력한 소수의 옛 진보주의의 여당들이 있어 이제는 같은 이유로 포퓰라레스(Populares) 당임을 선언하면서 술라의 엄한 과두체제를 다소 완화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민주파 또, 본래 포퓰라레스라 부르던 이들도 있는데 솔직하고 순수하며 협소한 마음의 급진자들로 정강에 따른 슬로건을 위해 재산과 생명을 저당잡힐 이들이며 승리 후에는 힘겨운 충격 속에서 자신들이 실제가 아닌 프레이즈를 위해 투쟁하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특별한 목적이라면 없앤 것은 아니나 그 본질적 특권을 가져가 버린 호민관 권한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중에게 신비스런 매력을 행사하였으니 분명한 실제 쓰임보다는 헛된 환영에 불과한 탓이었다-민중의 호민관이라는 이 허명은 한 개의 일천년기 이상 후에 로마를 혁명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술라복고기에 불만을 해소하지 못했던 수많은 중요 계급이 있었는데 그들의 정치적 사적 이익이 그에 손상을 당했었다. 포강북주민들 이런 이유로 반대당에 속했던 이들 중에 포강에서 알프스산맥에 이르는 지역의 조밀하고 많은 인구들이 있었다. 이들은 665년[BC89]의 라틴권리 부여[각주:1]를 완전로마시민권에 대한 단순한 할부로 생각하여 미래 소유의 토양을 제공했던 것이다. 해방노예층 이 범주에 해방노예들 또한 속하였는데 수적으로나 부에 있어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나 수도내의 그들의 결집은 위험했다. 이들은 보다 이른 시기의 실질적으로 무용한 참정권의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본가들 같은 위치에 서있는 자들로는 나아가 거대 자본가들이 있었는데 조심스런 침묵 속에서 끈질긴 분노와 동등한 강도의 끈질긴 힘을 전처럼 유지하였다. 도시무산자들 수도의 민중들은 무료 빵과 곡물들에서 진정한 자유를 인식한 만큼, 불만족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재산피탈자 더 깊은 분노는 술라식 몰수형에 영향받은 시민들 사이에 횡행하였다. 그들이 폼페이우스 가문들 처럼 술라식민자들에게 축소된 영지를 후자와의 영구적으로 충돌한 채로 같은 구역 안에서 누리고 살았던지, 아니면 아레티움인들(Arretines)과 보라테라이인들(Volaterrans)처럼 실질적인 영토를 보유하였으나 로마민중이 그들 목에 들이대는 몰수형이라는 다모클레스의 검(Damocles' sword )의 위협을 받던지, 혹은 특히 에트루리아(Etruria)에서 그랬던 것 처럼 전거주지에서 거지나 숲속의 도둑처럼 전락되었거나 마찬가지다. 금지자와 그 지지자들 최후로 소요는 이 복고의 결과 생명을 잃은 민주파 수장들의 친인척이나 해방노예들에게 까지 퍼졌는데 마우레타니아의 해변을 방랑하거나 비참히 떠도는 망명객으로 미트라다테스(Mithradates)의 궁정이나 군대에서 체류하였다.  이 시기 정치적 감정을 지배하는 엄격한 가족관계에 따르면 남겨진 자들이 추방된 친척이 고향으로 올 수 있는 특권을 마련해 주거나 사망 경우에도 그들의 기억과 자녀들에게 따르는 낙인을 해소하고 부치의 영지[각주:2]를 찾아주는 것이 영예로 생각되었다. 보다 특별한 것으로, 그 섭정이 법률로 정치적 천민으로 만든 금지된 자들[각주:3]의 자녀들이 그 법으로 부터 기존 질서에 대항하는 반란에 가담하게 하는 초대을 받아들이게 했다.  

 

경제적 몰락자 이 모든 반대파에 더해 재산들이 파멸된 군상들이 있었다. 고상하건 비천하건 간에 세련되면서도 저속한 잔치나 벌이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빚을 빼면 더이상 고귀함의 자질을 보일 수 없는 귀족 출신들이 그들이었다. 자신의 섭정이 토지소유자로는 만들어 주었으나 농부로는 만들지 못한 술라 군단병들 금지된 자들 금지된 자들의 첫 상속분을 받아 낭비해 버리고 두번째 분을 찾아헤매는 자들 등 이 모든 이들이 기존 질서를 뒤엎기 위해 싸우러 불러들이는 기치 밑이라면 무엇이 쓰여 있는지 상관없이 모여들 준비가 되어 있다. 야심가들 비슷한 필요로 부터 재능을 갖춘 야심가들은 인기를 찾아 스스로를 이 야당에 밀착했다. 이들 중엔 극히 폐쇄적인 옵티마테스(Optimates)에서 입당을 거부하거나 적어도 승진 기회를 거부해서 무력으로 그 팔랑크스(phalanx)를 뚫고 민중적 지지로 과두제적 배타성과 서열을 가진 법률을 박살내려 하는 자들 뿐 아니라 야심상으로 공모의 반경에 세계의 운명마저 결정짓는 이상에 뜻을 둔 더 위험한 자들까지 있었다. 특별히 변호인 석—술라가 개방해 둔 유일한 합법적 반대의 터전—에서는 그 섭정의 생시에도 이런 야심가들이 법학의 공인된 무기와 전투적 언변으로 이 복고체제에 맞서 전쟁을 벌였다. 예를 들어, 아르피눔(Arpinum)의 지주의 아들인 노련한 연설 마르쿠가스 툴리우스 키게로(648년[BC106] 1월 3일 출생)가 이 독재관에 대한 반대에서 대담함과 신중함을 섞어 자기 이름을 급속히 알렸다. 그 맞수가 고관 의자를 마련해 남은 여생을 만족스럽게 앉아 지내는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면 그런 노력들은 대단한 중요성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좌석이 대중적 인물을 주인으로 찾지 못하고 가이우스 크라쿠스(Gaius Gracchus )가 후계자를 찾게 되면 생사의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은 의심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허나 그런 이름은 그 주인이 이런 대단한 목적을 제안할 수 있는 이름의 소지자는 적어도 언급되지는 않았다.

 

반대당의 실력 술라가 조직한 과두정부가 힘겨루기하는 반대당은 이런 류로 되어서, 아마 술라 자신이 예상한 것 보다 이른 이 때 그의 죽음에 의해 지시되었다. 그 작업은 전혀 쉬운 것이 아니며 이 시기 다른 정치사회적 악들로 더 어렵게 되었다—특히나 민간분야 최고정무관에 속한 속주들에 군사적 수장들을 유지해야 한는 것과 군단 없이 수도에 몰려든 이탈리아와 이탈리아외부 인구 그리고 사실상 거기서 엄청난 자유상태로 살아가는 노예들를 다루어야 한다는 지독한 이중의 곤란이 컸다. 원로원은 마치 사면에서 위협에 노출된 요새에 위치한 것 같았으나 심각한 충돌은 불가피하였다. 그러나 술라에 의해 조직된 저항수단은 상당하고 지속가능한 것이었으며, 술라가 세운 정부에 대다수 국민이 분명히 취향을 달리하면서 적대감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정부는 오랜 기간 그 목적 혹은 수단에 동의하지 않는 반대파의 지도부 없이 수십조각 나 있는 혼란스런 오합지졸 무리에 대해 견고한 성벽을 이루었다. 오직 자리를 지키며 그런 그 요새를 건설했던 정력의 불꽃 정도만 그 방어에 붙여주는 정도만 필요했다. 스스스로를 방어하지 않는 수비대들의 경우에는 공들여 지은 요새성벽과 해자도 헛되기 때문이다.

 

지도자 부재 양 진영에서 모든 것이 지도적 인사들에게 궁극적으로 더 의존할 수록 양쪽 다 지도자가 없을 때는 더 불행해진다. 동아리체제 이 기간의 정치란 철저하게 더 타락된 형태의 동아리정치 영향하에 있었다. 이는 사실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가문과 동아리들의 닫힌 연합들이 국가에 대한 귀족적 조직화와 불가분했고 수세기간 로마에서 성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들어서야 그들이 전권적이게 되었는데 지금(690년[BC64] 처음)에야 그들의 영향이 억압의 법적 수단에 의해 견제되기 보다는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자질있는 모든 인사들 과두적 자산보다는 대중적 지지를 가진 자들이 헤테이리아이(Hetaeriae)에서 회합했다. 마찬가지로 시민들도 할 수 있다면 무리지어 군사조직과 밀접히 연계된 자기 선거구에서 있는 정치적 행사에 정기적으로 참여했다. 선거구에는 "부족분배자(divisores tribuum)"라 불리는 그 구를 대표하는 자연적 수장이나 대리인들이 있었다. 이런 정치적 동아리들을 통해 모든 것이 사고 팔렸다. 유권자의 표가 특히 그랬으나 원로원 의원이나 재판관들의표도 마찬가지며 거리소요를 만들어내는 주먹들과 그를 감독하는 두목들도 그랬다. 상하계급의 모임은 요금으로만 구별되었던 것이다. 헤테이라이가 선거를 결정했고, 헤테이라이가 탄핵을 의결했고, 헤타이라이가 그 방어를 수행했다. 이들이 빼어난 변호사를 확보했고 비상한 때에 판관투표권이라는 수익성 좋은 거래를 대규모로 쫓는 투자들 중 하나와 무죄거래를 했다. 헤타이리아이는 효과적 소규모 부대로 수도의 거리를 호령했고, 이 수도와 함께 더무 자주 국가를 호령했다. 이 모든 일들은 특정 규칙에 따라 소위 공개적으로 행해졌다. 헤테이라이 체계는 국가행정의 어떤 부서보다 잘 조직운영되었다. 문명으로 포장된 사기꾼들 중에 흔히 그렇듯 부정한 절차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어야 한다는 묵계는 있었지만, 누구도 그들을 비밀로 하지 않았고 뛰어난 변호사들은 고객의 헤테이라이와의 관계에 대해 드러내놓고 암시함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 이런 일로부터 초연하고도 공직에 나감을 주저하지 않는 한 개인이 있다면 그는 정치적 돈키호테 마르쿠스 카토(Marcus Cato)이다. 당파와 당파싸움은 이 동아리와 그 경쟁자들로 대체되었고 정부는 이들의 공모로 대체되었다. 푸블리우스 케테구스(Publius Cethegus)라는 더 애매한 인물로 전에는 최고의 열심 마리우스파 중 한사람이자 후에는 술라에게 환영된 투항자가 있었는데[각주:4], 이 기간 중의 정치적 행사에 가장 영향력 있는 역할을 했다—교활한 고자질장이이며 원로원정파간 중재자로서 그리고 모든 도당들의 비밀에 정치가다운 투시안을 가진 데 있어 비길데가 없는 자였다. 때로 가장 중요한 명령권직에 대한 지명은 그의 정부인 프라이키아(Praecia)의 말로 결정되었다. 이런 맹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평범을 넘지 못할 때 있는 것이다. 보통 이상의 재능의 어떤 사람도 거미줄 같은 당파체계를 쓸어내지 못했지만, 실상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능력있는 이들에 대한 비참할 정도의 부족함이 뒤에 있었다.

 

 

 

 

 

 

  1. IV. VII. Bestowal of Latin Rights on the Italian Celts, 527년. [본문으로]
  2. 뛰어난 문학교사로 해방노예인스타베리우스 에로스(Staberius Eros)가 금지된 자들의 자녀들에게 무료로 강의를 듣게 하였다는 것에 중요한 특징이 볼 수 있다. [본문으로]
  3. IV. X. Proscription-Lists [본문으로]
  4. IV. IX. Pompeius [본문으로]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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