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전(수에토니우스)

제2장 (수에토니우스 네로전)

DreamersFleet 2015. 1. 24. 18:01

 

 

따라서 우선은, 먼 옛날 시기 그의 증조부의 조부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Cneius Domitius)를 살펴보자. 그가 호민관이었을 때 아버지 자리에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선거한 이유로 대사제(pontiff)와 다투었고 선거권을 사제단에서 민회로 이전하였다. 그의 집정관 재직시[각주:1] 알로브로게스족(Allobroges)과 아그베르니족(Arverni)을 정복하고[각주:2], 이 속주를 행진하며 코끼리에 올라 개선식처럼 병사들이 그를 수행하게 했다. 이 인물에 대해 연설가 리키니우스 크라수스(Licinius Crassus)는 말했다. "황동수염이 이상할게 없다. 그의 낯가죽은 무쇠고 심장은 납이다." 그의 아들은 자기의 법무관 시절[각주:3]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가이우스 카이사르(Gaius Caesar)를 불러 원로원 앞에 그 직무와 행정 수행에 대해 해명해야 할 것을 제안했는데 그것이 복점과 법률 모두에 어긋나났기 때문이었다.[각주:4] 후에 스스로 집정관이 되었을 때,[각주:5] 그가 카이사르에게서 군대 명령권을 빼앗으려 했고 음모와 협잡으로 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내전 초 코르피니움(Corfinium)[각주:6]에서 포로가 되었다. 풀려나서 그는 마르세유로 갔고 거기서 곧 포위당하였다. 민중들에게 항전을 호소하였으나 곧 그곳을 버리고 파르살리아(Pharsalia)의 전장으로 가서 죽음을 당했다. 그는 일관성이 부족한 사람이고 침울한 성격이었다. 절망적 최후 상황에서 그는 음독을 하려햇으나 죽음을 생각하고는 전율하여 곧 후회하여 마음을 고쳐먹고 토해내고, 현명함과 신중성 있게 적당한 양만을 투약 자신의 의사를 노예에서 해방시켜 주었다.[각주:7]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가 중립에 기울고 다툼에 참가하지 않는 자들에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상담해 왔을 때, 적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했던 것은 그 밖에 없었다.

 

 

 

 

 

  1. A.U.C. 632 (B.C. 122) [본문으로]
  2. 전자는 다우피니(Dauphiny)와 사보이(Savoy)에 사는 갈리아족이고, 후자는 오베르뉴(Auvergne)에 그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알로브로게스족을 물리쳤다함은 수에토니우스의 오류로 이 종족을 물리친 것은 호민관 도미티우스이다. [본문으로]
  3. A.U.C. 695 (B.C. 58) [본문으로]
  4. 이런 제안들은 카이사르와 연대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게 좌절됨. [본문으로]
  5. A.U.C. 700 (B.C. 53) [본문으로]
  6. 코르피니오(Corfinio) 인근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이태리의 도시이다. [본문으로]
  7. 코르피니움 당시의 일로 그는 카이사르의 용서를 받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