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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7.24 제4권 001 - 1장 중 스페인 상황 (1)

제1장

그라쿠스형제시대까지 종속된 지역들

 

 

[종속국들] 마케도니아 제국의 소멸을 맞아 로마의 주도권은 헤라클레스의 기둥에서 부터 나일강과 오론테스강의 하구 쯤에 이르는 지역에서 기정사실이 되었을 뿐만은 아니었다. 마치 운명의 최종 판결처럼, 불가항력적인 압력이 그들 민족들을 억눌러 가망없는 저항에 죽든 희망없는 고통의 감내 속에 죽든 택일케 하였다. 만일 역사가 열성 독자들을 역사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모든 나날들, 봄과 겨울의 정경들 구석구석을 동행시킬 권리가 없다면, 역사가는 이미 로마제국의 병합된 스페인 속주들과 아프리카-희랍-아시아라는 아직 로마의 보호국으로 대우받는 지역들 양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월한 세력과 철저한 약자 사이의 이런 다층적이나 단조로운 변화들을 추적하는 황량한 작업은 피하고 싶도록 유혹될 것이다. 그러나, 개별 충돌이 아무리 하찮고 부수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에 총체적으로 깊은 사적 중요성들이 속하며, 이 시기 이탈리아의 여건들도 속주들이 모국에 보이는 반작용을 통찰함으로서 이해 가능한 것이다. 

[스페인] 자연적으로 이탈리아에 속할 것으로 간주되는 지대들을 제하고--그 마저도 토착민들이 완전 복속된 것은 절대 아니어서 리구리아인(Ligurian), 사르데냐인(Sardinians), 코르시카인(Corsicans)은 로마의 영예("마을 정복 기념 개선식"-윌리엄 딕슨 역)를 높여주었다, 이 시기의 시작 즈음 공식적인 로마의 주권은 피레네산맥(Pyrenees) 너머 동부와 남부의 대부분인 두 개의 스페인 속주에서만 확립되었다. 이 전에[1] 이 반도 내의 사태들을 기술하는 것이 시도되었었다. 이베리아인(Iberians), 켈트인(Celts), 페니키아인(Phoenicians), 희랍인(Hellenes), 로마인(Romans)이 거기서 잡거하였다.  문명화의 가장 다양한 형태와 단계가 거기에 공존하였으며 다양한 지점에서 교차하여, 이베리아의 고대문화가 완전한 야만풍과 병존했고, 페니키아와 그리스 상업도시들의 문명화된 상태가 시민(대규모 수비대-딕슨 역) 주도적 라틴화와 공존했다. 이는 은광(銀鑛)에서 쉴새 없이 일하는 수많은 이탈리아인에 의해 가속되었다.  이런 면에서, 소도시 이탈리카(Italica: 세비아Seville 근처)와 라틴식민시 카르테이아(Carteia:: 지브롤터만 상)는 언급할 가치가 있다--후자는 라틴어와 이탈리아 정체를 가진 최초의 해외 도시공동체였다. 이탈리카는 노(老) 스키피오가 스페인을 떠나기 전 (548년[기원전 206년]) 그 반도에 잔류하고 싶어하는 그의 퇴역병들을 위해 세웠다. 아마 시민공동체라기 보다는 시장(市場) 위주의 소도시 정도로 였을 것이다[2]. 카르테이아(Carteia)의 설립은 583년[기원전 171년]으로 거슬러 오르는데, 로마 병사와 스페인 비녀들 사이에 낳은 자식들인 병영 아이들 다수에 의해 유래되었다. 그들은 법률상 노예이나 사실상 자유 이탈리아인으로 자란 이들로, 이제 국가적으로 해방되어 카르테이아의 옛 거주민들과 연계된 상태로 라틴 식민시로 제도권으로 들어간 것이다.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가 이 에브로강(Ebro)의 속주를 조직한(575년[기원전 179년], 576년[기원전 178년],[3])  이후 거의 30여년간의 스페인 속주들은, 켈트이베리아(Celtiberians)와 루시타니아(Lusitanians)에 대한 한두 번의 원정 전쟁에 대한 언급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평화의 축복을 누렸다.

[루시타니아 전쟁] 그러나, 더욱 심각한 일들은 600년[기원전 154년]에 있었다. 루시타니아인들은 푸니쿠스(Punicus)라는 족장의 지도로, 로마영토에 침입 그들에게 협력해 맞선 두 로마 총독령을 덮쳐 다수의 로마인을 죽였다. 베토네스족(Vettones)-타구스강(Tagus)과 상두에로강(Upper Douro)사이에 있다-은 그 때 루시타니아족과 이해를 같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제 지중해 까지 뻗쳐나가 심지어 로마인들의 주도 신카르타고(카르테헤나Cartagena)에서 머잖은 바스툴리-페니키아인(Bastulo-Phoenicians)들의 땅까지 약탈했다. 로마에서도 이를 중대히 여겨 스페인에 집정관 한 사람을 파견하기로 결론 내리는데 이는 559년 이래 없던 일이었다. 원병 배치를 서둘기 위해 새해 집정관들의 법적 취임일을 두달 반 앞당겼다. 이리하여, 마르스 달(3월)의 15일에서 야누스 달(1월)의 초하루로 집정관 취임일이 변경되어 오늘 날에 이르기 까지 이날이 신년으로 정해지게 된 시초인 것이다.  그러나 집정관 퀸투스 플라비우스 노빌리오르(Quintus Fulvius Nobilior)와 그의 군대가 닿기도 전에, 타구스 우안 상에서, 먼 스페인 속주총독 법무관 루키우스 뭄미우스(Lucius Mummius)와 푸니쿠스 몰후 후계자인 카이사루스(Caesarus)에게 지도되었던 루시타니아인들 사이에서  아주 심각한 교전 하나가 일어났다(601년[기원전 153년]). 운명의 여신은 처음에 로마인들에게 미소지었다. 루시타니아 군대는 무너지고 진지는 탈취되었다. 그러나, 로마인은 일정 부분 행군에 지치고 일정 부분은 무질서한 추격에 분산된 상태에서 결국 패배당한 적들에게 완패하였으며, 적의 진지는 물론 아군 진지 마저 잃고 9000명의 사망자를 감수하였다.

[켈트이베리아 전쟁] 전쟁이 불길이 더 깊숙히 더 멀리까지 타올랐다.  카우카이누스(Caucaenus)가 지도하는 타구스 좌안의 루시타니아인들이 로마인에게 복속하였던 켈티키족(Celtici: 알렌테주Alentejo에 있었다)을 덮쳐 그들의 소도시 코니스토르기스(Conistorgis)를 빼앗았다. 루시타니아족은 뭄미우스 부대에게서 빼앗은 로마 군기들을 즉시 켈트이베리아인들에게 주어 승전보와 경계로 삼았으며, 이들 중에도 역시 동요가 없을 수 없었다. 강력한 아레바카이족(Arevacae 또는 Averaci; 두에로강과 타구스 강의 수원 주변)과 인접해 사는 켈트이베리아계의 두 개 소부족 벨리족(Belli)과 티티족(Titthi)은 자신들의 소도시 중 하나 세게다(Segeda)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성벽을 짓는데 여념이 없는 그들에게 로마인들은 종속 공동체들이 자의로 도시 세우는 것을 금하는 셈프로니우스의 규제에 따라 이를 단념토록 명하면서 동시에 조약에 명시되었으나 상당기간 요구하지 않은 인력과 자금의 공납을 요구하였다. 이 스페인 부족들은 두가지 모두를 거부하여, 도시의 창설이 아닌 확장의 문제일 뿐이라고 답하였으며 공납 역시 유예된 것이 아니라 면제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아피아누스의 전쟁사(43장)에 의하면 면제된 것은 사실이나 로마는 로마인의 이익에 부합할 때까지만이라고 답한다.] 이에 노빌리오르가 가까운 스페인 속주(Hither Spain)에 누미디아 기병과 10마리의 코끼리를 포함한 근 30,000의 병력으로 나타났다. 신도시 성벽은 여전히 미완인 만큼 대부분의 거주민들은 항복하였다. 그러나 적극적인 동조자들은 처자와 함께 강력한 아레파카이족에게로 달아난 후, 그들을 불러내어 로마인에 대한 공동투쟁을 결의했다.  아레바카이족은 루시타니아인의 뭄미우스에 대한 승리에 고무되어 그에 동의하며 세게다의 망명객인 카루스(Carus)를 장군으로 뽑았다. 선출 후 3일 째, 이 용감한 장군은 쓰러졌지만 로마군 역시 패했고 거의 6000의 로마시민이 살해되었다. 8월 23일 볼카날리아(Volcanalia) 제일(祭日)은 이 슬픈 날을 기념했다. 장군의 몰락은 아레바카이족에게 자기들의 최강력 요새인 누만티아(Numantia: 지금의 가라이Guarray로 두에로강 상의 소리아 북쪽 스페인 동맹)로 후퇴하게 하였고, 누빌리오르는 그들을 쫓았다.  이 도시 성벽 아래에서 두번째 교전이 일어났다. 로마인들은 처음에 코끼리 부대를 이용 스페인부족을 성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동안 상처입은 한 마리의 동물로 인한 혼란에 뒤엉켜 성벽에서 튀어나온 적에게 두번째 패배를 당했다. 이런 저런 또 다른 불운들--원병을 불러모으려 배치된 로마기병대의 섬멸 등--은 히스파니아 키테르오르(Hither Spain) 속주 사태에서 로마인들을 곤란하게 했으며 로마인들이 금고와 창고를 둔 오킬리스(Ocilis) 요새가 적에게 넘어갈 수도 있다는 우려를 가져왔고, 이에 반해 아레바카이족은 승리는 아니라도 로마인들에게 평화를 받아쓰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게 하였다. 이러한 불리는 뭄미우스가 남부 속주에서 거둔 성공에 의해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그 패배에 그의 군대가 약화됐지만, 그는 군대와 함께 타구스 우안에서 무심히 흩어져있던 루시타니아인들을 물리치며 다시 로마인들이 완전히 구축당했던 좌안으로 도하해냈다. 아프리카에도 진출했던 그는 적의 남부속주를 완전히 쓸어버렸던 것이다.

Posted by DreamersFl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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